
배추는 한국 요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핵심 채소이다.
수분 함량이 높고 섬유질과 비타민 C가 풍부하다.

배추하면 김치!
포기김치, 백김치, 겉절이 등등
한국인의 장기보관 식량인 김치의 주 재료이다.
김치의 재료가 아니라도, 배추만으로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배추된장국, 배추전골, 배추샐러드 등등이 있다.
오늘날 한국 식탁과 김치의 핵심 식재료 배추.
우리 나라사람들은 언제부터 이 배추김치를 담가 먹기 시작했던 것일까?
본래 배추의 원산지는 중국이다.
형태가 만들어 진 것이다.
한반도에 들어온 정확한 시기를 알수 없으나, 고려 고종 23년(1236년)에 출판된 의학서 ‘향약구급방’에 숭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고려에서 조선 초기만 해도 배추는 일반채소가 아니라 약초나 왕실 제사상에 올리는 귀한 식재료였다.종자를 중국에서 매번 들여와야 했고, 지금처럼 속이 꽉 찬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중기까지 재배되던 배추는 지금 처럼 속이 노랗고 속이 꽉 찬 배추가 아니었다.
비결구 배추라 하여 잎이 둥글게 말려 속이 차지 않았고, 상추나 갓처럼 잎이 밖으로 펼쳐져 얼갈이 배추와 같은 모양이였다. 그래서 그 당시에 배추 잎을 겉절이나 국거리 정도로만 사용했고, 무, 오이, 가지로 김치로 담가 먹었다.
18 – 19세기 중국 청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며 속이 차오르는 결구 배추 품종이 들어왔다.
19세기 즉, 1800년대 후반 개성과 한양 인근에서 속이 반쯤 차는 반결구 배추(개성배추, 경성배추)를 자체적으로 선발 및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속이 꽉 차고 수분이 많은 배추가 보급되고, 18세기 무렵 한반도에 정착한 고춧가루+젓갈 문화와 결합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먹는 빨간 포기 김치의 형태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20세기 초까지도 속이 완전히 차는 우수한 배추 종자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야했다.
국내에서 씨앗을 받아 다시 심으면 형질이 변해 알아 차지 않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였다.

우장춘 박사는 세계적인 농학자이자 식물육종학자로,
광복 후 황폐해진 한국의 농업을 일으켜 세우고 채소 종자의 자급자족을 이뤄낸
한국 농학의 아버지이다.
1950년, 6.25 전쟁 난리통 속에서도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가 한국 기후에 맞고 속이 단단하게 차오르며 병충해에 강한 통배추 종자를 집념으로 개발했다.
이 연구 덕분에 한국은 배추 종자를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마침내 사계절 내내 속이 노랗고 알찬 배추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이였다.
우장춘 박사님에 대한 파란만장한 히스토리는 SBS 교양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서”
‘매국노가 낳은 애국자’ 라는 제목으로 다뤄진 적도 있다.
우장춘박사님은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서 태어났다.
을미사변 관련자인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한 후 식물유전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었다.
1950년, 정부와 민간의 요청으로 일본에서의 안정된 삶과 가족을 뒤로 하고 홀로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국 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6.25 전쟁 난리 통 속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고 국내 채소 종자개량 사업에 매진하였다.
1959년 우장춘 박사님은 병상에서 정부가 수여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은 직후,
“길러준 조국(일본)과 낳아준 조국(한국)에 보답했다” 라는 말씀을 남기고 서거하셨다.
일본에서 배운 농업과학으로 세계속에 일본의 농업과학기술을 드높혔으며 그 기술을 황무지와 같던 조국에 씨앗을 뿌린 것이다.
생애동안, 친부가 관련된 민비시해사건에 대해 본인은 본인의 업으로서 조국에 사죄를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본인의 남은 인생을 대한민국에 다바쳤다.
당시 일제강점기에 죄다 수탈당한 것도 모자라 초대강국들의 외압으로 발발한 6.25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가슴아픈 역사 속에 초빈민국으로 땅에서 재대로 나는 채소 조차 없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우장춘박사님께서 영양가 있고 단단해서 오래오래 장기보존을 하여도 흐므러 지지 않을 백성들이 배를 곪지 않아도 될 지금의 맛있는 배추를 만들어 주셨다.
우장춘 박사님은 대한민국 과학기술 국가유공자이다.